이틀째 비가 내린다. 약비라서 그런가. 그리 싫지 않다. 다소 굵게 내리던 빗줄기가 어느 결에 가루비로 변해 조용히 내려앉고 있다. 창밖으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고 아예 만뢰산 생태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오랜 가뭄 끝에 물기 머금은 산 녘의 갈맷빛이 한층 생기롭다.

투명한 비닐우산을 챙겨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비도 아닌데 시커멓고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었다면 오늘 펼쳐진 이 자연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슬며시 치기가 들어 미소가 물린다.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니 기다렸다는 듯이 모감주나무가 노랗게 웃고 서 있다. 자동차를 몰고 오는 내내 길가에 노란 꽃을 피우고 서 있던 나무들이 모감주나무였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 사람 좋은 경비아저씨마냥 반긴다. 인심 좋은 모감주나무엔 벌들이 윙윙댄다. 비오는 날, 일을 나온 벌들을 보니 신기하다.
자생수목원, 생태탐방로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오르는 길이 호젓하다.

둘이 한 우산을 쓴 남녀가 지나쳐 갔고, 몇몇 여인 한 무리를 마주쳤을 뿐, 비닐우산을 빙빙 돌리며 유유자적하는 사람은 나 혼자다.

콩 톨 만한 열매를 다닥다닥 매달고 있는 때죽나무가 통성명을 하자고 손을 내민다. 얼결에 악수를 하고 나니 아그배나무가 눈을 찡긋한다. 때죽나무 보다야 아그배가 이름도, 열매도 한결 예쁘지 않느냐는 뜻이겠지. 그 옆에 있는 꽃사과나무는 체리만한 열매를 발갛게 달고 미소를 짓는다. 이 계절의 싱그러움이다.

야생초원에 이르니 봄꽃 잔치를 치르고 난 뒤, 계절이 지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민낯이 정겹다. 산기슭 쪽 산책로 따라 파르름한 꽃잎이 나비인 듯 팔랑팔랑 손짓을 한다. 무리지어 있는 산수국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니 비에 젖어 함초롬한 산수국의 삶이 눈물겹게 읽힌다. 쌀톨 만한 꽃 수백송이를 모닥모닥 달고 있어도 하찮은 곤충조차 거들떠보지 않던 삶, 종족 번식을 위한 모성은 잘디 잔 꽃송이 가장자리에 아름다운 헛꽃을 들였다. 처첩(妻妾)의 공생인가?

잉크 물을 풀어 놓은 듯 청신한 얼굴이 있고, 연분홍 수줍음도 있다. 보랏빛 고고함으로 시선을 끄는 꽃잎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가늘고 긴 허리를 낭창낭창 화사하게 피어난 이 헛꽃을 보고 벌, 나비가 절로 꼬여드는 것이리다.  때 마침 빙빙 허상을 좆던 벌 두엇이 걸려들었다.

어쩌려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웬일인지 날아든 벌들이 쌀알 흩뿌려 놓은 듯 자잘한 꽃송이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암술 수술을 다 갖추고 있는 꽃, 진짜 꽃은 그 작은 몸체들이었다.

손톱만한 헛꽃에는 꽃술이 없다. 뭇 시선을 받고 있는 아름다움은 결국 꽃의 모습을 흉내 낸 헛것에 불과했다. 가루받이를 할 수 없는 꽃, 석녀의 몸이 파르르 흔들리고 있다.

참꽃과 헛꽃, 삶의 진정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함초롬히 빗물 머금은 산수국이 애틋하다.

◆김윤희 작가는?

▲200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대표에세이 문학회 부회장, ▲충북수필 주간 충북문협 편집부장, ▲한국문인협회ㆍ진천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순간이 충지를 틀다' ▲대표에세이 문학상 수상 등


 

저작권자 © 매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