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담장 삼아 심어놓은 남천나무 잎사귀 위로 빗물이 걸터앉는다. 이웃하고 있는 아까시나무도 흥겨운 듯 너울너울 춤추며 물장난을 친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출 때면 저 멀리 두타산 골짜기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어찌 보면 신선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릴 적 저녁밥 짓느라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같아 보인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던 시절에는 장마철이 다가오면 땔감 구하기가 어려워 생솔가지를 꺾어와 불을 지폈다. 불쏘시개도 귀해 풍구로 돌려 화력을 불어넣지만 매운 연기는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렸다. 검은 연기는 제 맘대로 퍼져 집안을 가득 메워놓았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었을 게다.

그날은 아침부터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오전과 오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새무룩해져 있었다. 학교를 가기위해 비가 긋기를 기다리지만 야속하게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비닐우산이 망가질까봐 우산살을 꽉 움켜잡은 채 빗줄기를 마주하며 걷는 길이 질척하여 만만치 않았다. 온통 흙탕길로 변한 신작로를 걸어 교실에 들어서면 바짓가랑이는 흠뻑 젖고 흙살이 달라붙어 종일 거슬렸다.

등교하느라 진땀을 뺐으니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점심시간이 돌아와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양은도시락은 절반이나 줄어들었을 것이다. 뚜껑을 흔들어 열어보았다. 보리밥에 감자 두 개가 차지게 들어앉아 있다. 꽁보리밥위에 계란 프라이라도 떡하니 자리하길 기대했지만……. 고추장에 무친 장아찌 반찬은 입맛을 잃게 하였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은 곱절로 힘이 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신작로를 지나‘상지말 고개에 접어들면 능선이 막아주어 우산을 잘만 받쳐 들면 상의는 젖지 않았다. 그러나 연꽃 방죽에 이르면 상황이 바뀌어 비닐우산을 쓸 수가 없었다. 들녘에서 몰아치는 왜바람은 볼기짝으로 달려들어 눈뜨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검정고무신은 왜 그리 진흙에 달라붙던지 시궁창 같이 질퍽한 둑에선 몇 발자국 떼지 않아 신발을 벗어 들어야 했다. 맨발로 걷다 보면 밀가루를 밟는 것처럼 촉감은 부드럽지만 미끄러워 가랑이가 쭉쭉 벌어졌다.

때론 진흙바닥에 곤두박질쳐져 곤욕을 치렀다. 고사리 손에 들려졌던 비닐우산은 처참하게 찢겨져 어린 가슴을 아리게 하였고, 골목길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바람이 잦아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비바람이 분탕질해 놓은 옷을 벗어 던지면 긴장이 풀려 온몸이 녹작지근해졌다. 어머니께서 강낭콩을 넣고 쪄 놓으신 개떡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한참을 곤하게 자다 깨어보니 언니도 동생도 아무도 없었다. 벌써 학교에 간 줄 알고는 허둥지둥 책보를 허리춤에 둘러매고 골목길로 내달렸다. 연꽃 방죽을 지나‘상지말 고개’앞까지 당도했을 때서야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길가엔 책보를 둘러맨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되돌아서서 바라보는 마을은 마치 그림 같았다. 집집마다 굴뚝에선 하얀 저녁연기가 마을을 에두르며 곱게 피어올랐다. 

가슴속에 머물러 있는 유년의 추억은 장마철마다 구름 꽃으로 피어난다.

박윤경 작가는 문예한국으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진천문인협회, 중부문학회 회원, 전국농어촌주부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멍석카페' 수필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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