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가 아롱아롱한 어느 봄날이었다.!

수줍은 눈빛으로 공방 문을 빼꼼히 열며 한 아가씨가 들어섰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하고 깔끔한 옷차림은 단정해 보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싶어 찬찬히 살펴보니 어딘가 모르게 어눌해 보였다.

몸도 나른하던 차에 그런 그녀가 썩 달갑진 않았지만 일손을 놓고 맞이하며 응대해 주었다. 나이는 스물여덟이며 자기이름과 집이 공방 뒤라고 알려준다. 한지에 대하여 수줍게 물어보는 그녀, 감탄도 해가며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한 후 돌아갔다.

그 뒤 그녀는 내가 혼자 있음을 확인하는 날이면 수시로 들락거리며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눌한 말투로 쉬지 않고 늘어놓는 이야기에 점점 그녀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늘 바쁜 내 일에 방해가 되기도 했고, 어수룩한 그녀로 인하여 실은 주위의 시선도 의식됐다.

어떤 날은 식사 시간이 지나도 가질 않아 같이 밥을 먹기도 했고, 여느 때는 따라 나서서 시장을 보기도 했다. 조용조용 한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수다가 싫어서 볼일이 있어 나가야 된다며 공방 문을 잠그고 나가서 혼자 드라이브하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들어와 일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보내놓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해하면서 아쉬운 표정이 아른거려 나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줄 곧 들어 왔지만 질문을 해 본적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게 그녀는 몇 달을 수시로 방문을 했지만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녀가 오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면 무의식 속에 문 쪽을 자꾸 보게 되었다. 때로는 일부러 문을 열어 놓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 이주일이 지나도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공방주위를 수시로 다니던 그녀였는데 무슨 일이 있나 슬그머니 궁금해 하면서 시간과 함께 잊혀져 갔다.

능소화가 척척 늘어져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어느 날이었다. 동네 슈퍼마켓 앞 평상에서 지인과 캔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요즘엔 보이질 않는다 했더니 뜻밖에 그녀의 비보를 들려주었다.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한참을 멍 하다가 그렇게 귀찮아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평범하지 못하다 해서 소홀이 대한 거며, 그녀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전혀 없었던 나의 무관심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나 싶었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좀 더 관심을 갖지 못한 것에 마음속에 돌덩이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무겁게 느껴졌다. 하룻밤 연을 맺고 임금을 사모하다 죽은 소화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는 능소화의 전설처럼, 스물여덟 그녀에게도 소화 같은 사랑이 왔던 것일까? 아니면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생을 접게 했단 말인가.

울타리나 나무 둥치를 휘감으며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도 관심을 받으며 피어난 꽃이 더 화사하고 곱다.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조금의 관심을 나눠 주었더라면 지금쯤 나팔꽃처럼 함박웃음을 자아내며 쉼 없이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능소화가 피는 계절이면 문득문득 그녀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녀가 날 변하게 만들었다. 인상무인(人上無人) 인하무인(人下無人)을 실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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