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고 막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규 발령을 받고 시골의 한 중학교에 부임하여 첫 번째로 치른 1학기말고사 때의 일이다.

그 시절에는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시험지를 모두 수작업으로 했다.

철판에 파라핀으로 코팅된 원지를 올려놓고 철필로 일일이 긁어서 시험지 원본을 베껴 써야 한다. 나는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힘 조절이 미숙하여 도중에 찢어지기 일쑤였다. 찢

고 다시 쓰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일은 고역이다. 더구나 여러 과목이다 보니 밤샘은 기본이고 어깨와 팔이 빠져 나갈듯 아파 입맛까지 없어진다. 겨우겨우 완성하여 등사실에 넘겼다.

“아저씨, 다 됐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 막내선생님 벌써 다했어?” 사십대 후반정도 된 소사 아저씨가 아이들 앞에서 막내라고 부르며 반말을 할 때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등사실에서 시험지를 찍어내는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다음날 아저씨는 잉크가 묻고 구겨진 원지를 들고 교무실에 와서 “어떻게 썼기에 등사 도중에 원지가 찢어져요? 다시 해야겠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겠는가. 수업이 모두 끝난 후 또 다시 밤새 그 철필작업에 매달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됐겠지?

점심을 먹고 모처럼 여유로운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며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드르륵’ 교무실 문을 열고 소사아저씨가 들어선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발, 나에게 오지 말아요.’ 하는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승사자처럼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나는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막내 선생님, 이번에는 과학시험지가 구멍이 뚫려 번지는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혔다.

과학은 그림도 많은데 어쩌라고 하필 과학이람. 순간 부끄러움도 잊은 채 울어버렸다.

보기가 딱했던지 교무주임이자 과학선생님이 대신 써주겠다고 선뜻 제안을 하셨다.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했다. 학생들이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다면 당시 나에게 시험지내는 철필작업은 가히 공포수준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소사아저씨는 군기를 잡는다며 그런 수법으로 신규선생님을 골탕 먹인다고 했다. 그는 지역 출신인데다 15년 이상 계속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까닭에 학교에 관한 모든 일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터줏대감처럼, 때때로 교장, 교감 선생님께도 버릇없이 굴었다.

이듬해에는 공교롭게도 그의 둘째딸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사정이 달라졌다. 그해 아저씨는 완벽한 나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청해 왔다.

가끔 푸성귀를 가져오기도 하고, 맛있는 반찬도 보내 주기도 했다. 갑을이 바뀐 셈인가? 돌고 도는 것이 세상사요, 한 치 앞도 못 보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소사아저씨의 텃세는 그렇게 내 추억속의 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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