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년의 은둔생활 판화가 김준권

충북 진천은 예로부터 은둔자의 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9세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진천 땅으로 숨어들었다. 경기도 안성시와 맞붙은 백곡은 숨어 살기에 좋았다.

사통팔당 길이 뚫려 있으되 얕은 산속에 숨으면 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속에서 교도들은 숯을 굽었다. 가마가 쉬는 날이면 교도들은 가마 속에서 성경을 읽고 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숯 70%를 백곡에서 굽고 있다. 1992년 이곳 백곡 은둔지에 판화가 김준권(60) 이 숨어들었다.

이곳에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은 전남 영암 태어나 1960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판잣집에 살면서 부모가 돈을 버는 동안 김준권은 그림을 그렸다.

반대를 뿌리치고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75학번 미술학도는 1984년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라는 참여작가 전시회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가 압수를 당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198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가 해직됐다.

그 후 만 3년 동안 전업 활동가로 인생을 살았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사망사건 걸개그림을 비롯해 웬만한 시위 현장 걸개그림은 다 그가 그렸다.

판화로 찍으면 동료들이 복사를 해서 초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었다 인생은 화가에서 판화가로 흘러갔다. 소위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시작한 판화가 업이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우리가 거리로 나가는가, 민족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가, 미술로 공동체를 실현할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판화라는 장르가 이 엄한 시대 유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우리 인새는 거의가 목판이었다. 팔만대장경도 목판인쇄가 안닌가, '전쟁과 산업화로 초토와돼 버린 미술적 맥락을 잇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2년 김준권은 사회운동을 떠나 충북 백곡면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가깝되 숨어 살기 딱 좋았다, 천주교도들이 숨어든 이유과 동일했다. 남의 땅을 빌려 움막을 짓고 목판을 새겼다. 왼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칼을 놀린 덕분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엄지발가락처럼 넓적하고 커졌다.

 

▲ 김준권 판화가의 2015년작 유성목판화 작품

그는 말했다. "세상은 단색이 아니었다. 한국, 정말 컬러풀한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대 날카로운 단색을 버리고 채색 판화를 택했다. 복사꽃 핀 진천 들판을 그렸고 대숲 가득 부는 바람을 그렸다.

활황이던 1990년대 김준권은 잘나가는 판화가 반열에 올랐다. 중국에서 3년 동안 공부도 했다. 일본 공방에 가서 6개월 동안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공부했다. 결론을 내렸다. "한국적인 판화를 한다."

서양 유성 잉크를 원판에 발라 서양 판화지에 찍어내는 서양식 판화 말고 한지(韓紙) 에 수성 먹으로 찍는 수목 판화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먹은 번지고 한지도 번졌다.

먹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면서 생기는 은근한 효과는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는 노라운 세계였다. 민족공동체와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진천 첩첩산중에서 완결된 것이다.

24년 전 그가 만든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도저히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믿기지 않는다. 여유와 화려함, 너그러움과 관용이 날카로운 비판을 대체했다.

판화가 김준권은 "나는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올바르게 돌아갔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진천 백곡 땅에서 여유를 얻었고 날카로움이 무뎌졌으며 직설과 투쟁 대신 은유와 여백을 얻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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