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문화관광해설사에 입문을 한지 5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오늘은 집과 조금 거리가 있는 정철 선생의 사당인 송강사에 근무를 하는 날이다.

송강사에 거의 다다를 즈음 길옆에 탐스러운 딸기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멈추어 보니 내 어렸을 적 아버지가 따다 주시던 멍석딸기다. 한두 알 따서 입에 넣으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하다.

오대 독자인 아버지는 아홉 살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두 분이 사셨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아홉 살부터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동네 어른한테 부탁을 하여 아버지에게 맞는 지게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그 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다니며 어머니를 도우셨다며 약주만 드시면 우리들을 앉혀놓고 넋두리를 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지게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언제나처럼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지게를 지고 들로 가셨다. 새벽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실 때는 지게 바소쿠리 하나 가득 색깔도 선명한 멍석딸기를 넝쿨 채 베어 오셨다.

어머니는 가시에 찔린다며 우리들에게 손도 못 대게하고, 손수 따서 바구니에 담아 나누어 주셨다. 우리들은 한 움큼씩 입에 넣고 씹으면서 톡, 톡 터지는 알갱이의 느낌을 만끽하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멍석딸기는 장미과에 속하는 덩굴성 낙엽 관목이다. 생약명으로는 산매, 백사파, 홍배소라고 한다. 약효는 간열, 간염, 감기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한 움큼 입에 가득 넣고 먹을 때 그 달콤함이란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이러한 시골 동네가 6.25가 지나고 몇 년 안 되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 일 없이 논밭을 다녔다. 우리 논밭 뒤로 활주로가 들어서면서 동네와 부대 사이에 철조망을 치고,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하라고 한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출입증을 주면서 정문으로 다니게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어느 만큼의 돈을 주고 정부 재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후로 낭만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어머니께서 먼저 말씀을 하신다. 지금쯤 그 논둑에 딸기가 풍성하게 열렸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신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머니는 딸기가 아쉬운 것이 아니라 논이 흡수되면서 우리 집의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과일도 마음껏 사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그리 표현하신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멍석 딸기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딸기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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