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그날도 오늘처럼 아까시 향이 만발했었다.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깊게 패여 있는 주름살에서 남편의 세월을 읽는다.

20여 년 전에 우리 부부는 결혼을 하여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첫 아들을 낳아 시부모님과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2년 터울로 둘째 딸을 낳았다. 모두의 축복 속에 마냥 행복했다.

그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둘째가 중증심장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염색체 이상으로 지적장애 진단을 받게 되었다. 나는 몸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아이와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그날 이후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화를 아이와 나에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까지 더해졌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그럴 때면 정말로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솟았다.

아이가 커 가면서 경제적으로도 힘이 들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힘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남편과 마음으로 수없이 이혼을 생각했지만 아이를 살려야 했기에 그런 마음조차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를 삭였다. 수술과 언어치료를 병행하며 아이를 위해 하루하루를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아왔다.

학교 들어 갈 때가 되어 다른 아이들과 같이 학교를 보냈는데 거친 사회의 벽을 실감했다. 6년 이라는 시간을 내 눈물로 이야기를 대신해왔다.

일반학교에서는 더 이상 안 되겠구나 싶어 거리가 멀어도 특수학교로 진학을 시켰다.

처음에는 아이가 피곤해 했지만 학교생활을 잘 적응해나갔다.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남편을 학교에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한 해 두 해 겪으면서 남편은 딸애의 장애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게 아이에 대해 너무 몰라 미안했다며 자기반성도 했다.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그동안 힘들고 서러웠던 마음이 일순간 녹아내린다. 그때서야 나는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도 힘들었겠구나, 아팠겠구나 생각을 하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평생 남편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내 마음이 누그러져 갔다.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왔던 지난 시간, 나는 가슴 깊이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져 간다.

용서란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을 풀어내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며 하늘을 본다. 아까시 꽃잎이 꽃비처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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