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스치는 바람따라 나무의 향기가 느껴진다.
습자지에 물감이 번지듯 저수지에 산그늘이 드리워져 평온한 오후다. 길을 가다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기웃대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접혔던 마음 한 자락이 펼쳐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이젠 이 길이 낯설지가 않고 정겹게 느껴진다.
아직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서투를 때도 있지만 그 또한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닌가하고 편하게 생각한다.
굽어진 등처럼 휘어진 길을 가다보면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끝없이 가고 싶은 유혹을 견디며 핸들을 돌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 얘깃거리는 무엇일까?'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르신, 어르신! 어디 계세요?" 큰 소리로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응, 누구여?" 어르신이 인기척을 느끼고 문을 열어 주신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이고, 선생님이네. 어서 들어와요."
반가움에 웃는 모습이 꽃처럼 환하다. 내 손을 잡은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순박한 마음으로 꾸밈없이 대하는 어르신께 딸처럼 응석을 부리듯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깔깔 웃다 보면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된다.
굽은 허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박해진 손으로 텃밭에서 기른 호박을 손수 따 주기도 하고 방금 찐 고구마를 주기도 한다.
때로는 자녀에 대한 것이나, 살아오면서 겪은 아픈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기 일쑤이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 이 일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내 적성에 맞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천직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했는데 때때로 삶에는 변수가 따른다.
새 일자리에서도 난 여전히 선생님이라 불린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또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좋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고 있다. 변화하는 사회, 불확실한 시대에 나의 미래에 대한 방편으로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노인 복지관에서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경험 삼아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지원서를 냈는데 합격이었다.
그동안 자유롭게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밴 나로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좋았다.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있다는 것도 선택하는데 한 몫을 했다.
면접을 볼 때 면접관 중 한 분이 하신 말씀 중에 미래의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여태까지는 독거노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또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도 알지 못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나를 본다. 요즘처럼 인간관계가 즉각적이고 호흡이 짧은 시대에 '관심과 배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저수지가 너른 품으로 나를 안아줄 것 같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