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는 5월 중순에 찾아와 여름동안 번식하고 10월쯤에 떠나는 철새로서 자신보다 10배 이상 작은 휘파람새, 산솔새, 뱁새등 10여 종 이상의 산사들의 보금자리에 한가씩 알을 낳는다.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는 큰 덩치로 작은 새의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작은새는 뻐꾸기가 제 새끼인 줄 알고 부지런히 벌레를 물어다 열심히 키운다.

그러자 새끼가 다 자라게 되면 어미 뻐꾸기가 데리고 간다. 세상에 이런 얌체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이치와 순리가 있다.

뻐꾸기는 아무 둥지에나 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번식력이 강해 수가 증가하는 새의 종류에게만 알을 낳아 다양한 새의 종류가 함께 생존할 수 있는 자연의 균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 종류만 급격히 불어나고 다른 종류는 먹을 것도, 둥지 지을 곳도 없는 생태계의 위기가 발생할 것이고 이로 인한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또한, 뻐꾸기는 하루에 70여 마리의 해충을 잡아먹는 이로운 새인 것이다.

시속 40㎞이상의 강풍과 영하 30℃의 이 극한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여 생존해 가는 식물도 있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지의류는 어떤 생물도 생존이 불가능한 험준한 산꼭대기나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의 바위에서도 살 수 있다. 자라는 속도가 너무 느려 거의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은 ‘시간을 녹슬게 하는 식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로 왜곡, 변질되는 동·식물이 많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여 자연 생태계와 자신의 생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인간의 시각과 잣대로 그들을 억울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천 수만년 자기 본연의 진실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보다.

자연계처럼 인간계에도 사람들의 시각과 잣대에 잘 보이려 하지 않고 갖은 오해와 편견∙왜곡을 경험하여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진실되게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길프는 “칭찬받을 일도 하고도 비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하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의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믿어주며 나의 오늘을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또한 너무도 아름답다.

이렇듯 서로가 자신의 삶에 진실되이 최선을 다하고 서로가 표면적인 것만이 아닌 그 뒤의 깊은 곳까지 바라봐줄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행복할까! 어떤 때는 사람다운 사람보다 동·식물 같은 사람이 더 정겹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도 서로를 인정해 주면서 동ㆍ식물같은 후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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